성경속 전생과윤회

기독교는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가?

제라늄A 2021. 12. 21. 21:39

예수님은 오늘날 기독교가 부정하는 “전생과 윤회”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통해서도 이미 전생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 “전생과 윤회”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전생과 윤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예언하였으며 예언 하신대로 “전생과 윤회”에 존재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오리라 하고 기다리는 엘리야가 이미 세례 요한의 몸을 입고 왔다”(마17:11-1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 즉 전생의 대한 말씀은 들을 귀가 없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세례 요한)이니라,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가 다시 오리라고 예언한 “엘리야” 선지자가 곧 “세례 요한”의 몸으로 “윤회”되어 다시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전생”에 있었던 “엘리야”가 “현생”에 다시 “세례 요한”의 몸을 입고 이미 와 있다고 “전생”과 “윤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17:11-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 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이렇게 성경은 “엘리야”가 “윤회”하여 “세례 요한”의 몸을 입고 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은 “윤회”를 부정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윤회”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생과 윤회”는 도마복음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도마복음 84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의 모습을 볼 때에 너는 기뻐하지만 너희 죽는 것도 아니고 드러난 것도 아닌 전생에 존재하던 너희 형상을 볼 때 너희는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가 부정하는 “전생”에 대해서 도마복음에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상기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너희가 현제 너희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만 너희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곧 “전생”에 존재하던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너는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련 말씀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내생”에 천국에 간다는 것은 철저히 믿고 있으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부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 들어보는 말씀이라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도마복음서를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마복음서를 신약성경에서 삭제한 이유 중에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생”에 대한 말씀을 도마복음서에만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4 복음서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는데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영안이 없어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이 “전생”의 말씀을 부정하고 이단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현실에 존재하는 모습만 보고 좋아 하지만 너희가 “전생”의 네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라고 본문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만일 “현생”에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다면 “전생”의 자신의 모습과 “내생”에 나타날 자신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전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직 자신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어제가 없으면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으면 내일도 있을 수 없듯이 “전생”이 없는 “현생”이 있을 수 없고 “현생”이 없는 “내생”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며 자연의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인들도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는데 기독교만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사상은 “부활”이요 불교의 근본 사상은 “해탈”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부활과 해탈”은 용어만 다르지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 부르고 불교인들이 반야라 부른다 해서 유일신이 두 신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신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신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오늘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실존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이며 오늘날 육신을 입고 오신 “실존 부처님”은 반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 말합니다. 이렇게 “사랑”은 기독교의 전매특허처럼 되었고 “자비”는 불교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사랑”은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부처님의 “자비”가 불교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지구의 모든 곳을 고루 비춰주듯이 예수님의 “사랑” 과 부처님의 “자비”는 용어만 다를 뿐 무명 가운데서 죽어가는 중생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과 반야의 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며 어느 특정한 종교나 특별히 한정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은 기독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고 반야의 “자비”는 불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기독교 안에는 사랑이 없고 “자비”는 불교 안에는 진정한 “자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안에만 있고 “자비”는 부처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진정한 “사랑”(아가페)은 부활된 실존 예수님 안에만 있고 “자비”는 오늘날 해탈된 “실존 부처님” 안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실존 예수님”이 없고, 불교 안에는 “실존 부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구름 타고 재림하실 “실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불교인들은 지금도 다시 구름 타고 오실 “실존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살아있는 “실존 예수님”이 계시고, 불교 안에 살아계신 “실존 부처님”이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예수님”를 기다리며 불자들은 무엇 때문에 구름 타고 오실 “재림 미륵불”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불교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은 오늘날 불교 안에 “실존 부처”가 없고, 기독교 안에 “실존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불자들은 누가 “해탈”을 시키며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가 “부활”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오늘날 불교나 기독교 안에는 없지만 불교와 기독교밖에는 항상 언제 어느 때 “실존”으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불경이나 성경을 깨달은 사람들만 “해탈과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불교와 기독교의 틀 속에 갇혀있고 또한 욕심과 탐심 때문에 눈이 멀어 오늘날 살아계신 “실존 부처님”이나 “실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나 기독교가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되려면 하루속히 기독교는 거짓된 “신학” 교리에서 탈출해 벗어나야 하고 불교는 거짓된 “불경” 교리의 틀에서 탈출해 벗어나 오류 없는 진리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불교의 “실존 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 기독교의 “실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인 불교인들이나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우상 부처님, 우상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자체를 모르고 “우상 부처님, 우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이런 글을 읽으시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