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地獄)에서 천국(天國)까지

지옥(地獄)에서 천국(天國)까지 (2번)셋째 길 : 축생계(畜生界)

제라늄A 2023. 12. 25. 12:28

셋째 길 : 축생계(畜生界)

축생의 탈을 벗어버리는 길 - 인욕(忍辱)

축생(畜生)이라는 말은 소나 돼지나 양과 같은 짐승들을 기리키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축생은 실제 짐승이 아니라 축생의 차원이나 상태에 있는 중생들을 말하고 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보시(布施)를 열심히 행하여야 한다는 것과 아귀계로 나온 불자들은 부처님의 계율(戒律)인 십계(十戒)를 열심히 지키며 올바른 수행을 해야 아귀계(餓鬼界)에서 벗어나 축생계(畜生界)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불자들은 물론 수행자들도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지옥계(地獄界)에서 벗어나 아귀계(餓鬼界)로 진입한다는 것도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불자들이 천상에 올라가 부처가 되려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통해서 죄업을 날마다 씻으며 전생( )에 자신이 쌓아 놓은 잘못된 고정과념(固定觀念)과 더러운 마음을 하나하나 모두 벗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전생과 현생의 악업( )을 하나하나 벗고 정결한 마음이 될 때 축생에서 벗어나 수라계(修羅界)로 올라가 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 세계에서 아귀계로 한번 나와 보지도 못한 채 수 억겁을 지옥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면소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들이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도 수많은 세대를 윤회(輪廻)하면서 힘든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축생(畜生)의 상태까지를 삼악도(三惡道)라고 말씀하시는데 삼악도란 삼악(三惡) 과 삼도(三道)를 말한다. 삼악(三惡)은 지옥의 악과 아귀(餓鬼)의 악과 축생(畜生)의 악을 말하며 삼도(三道)는 삼악에서 벗어나는 세 길을 말하고 있다. 

삼도(三道)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을 말하는데, 중생들이 삼악(三惡)에서 벗어나려면 삼도(三道)를 통해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축생계(畜生界)에 머물고 있는 수행자들이 축생계에서 벗어나려먼 무엇보다 오래 참고 인내하는 인욕(忍辱)의 수행을 끊임없이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축생계(畜生界)에서 벗어나는 길을 인욕(忍辱)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축생(畜生)들이 받는 인욕(忍辱)은 수행과정에서 발생되는 각종 치욕과 모욕을 참고 견디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주인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 무조건 순종하며 살아가는 머슴이나 종과 같이, 혹은 군인이 되기 위하여 훈련소에서 모진 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병과 같이 부처님의 계율(律戒)과 명령에 절대 복종을 하면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참는 것이다.

축생계(畜生界)에서 인욕의 과정을 받고 있는 수행자들은 실제 축생들과 같이 때로는 주인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열심히 걸어가는 나귀와 같이 혹은 멍에를 씌워 놓은 소가 묵묵히 밭을 가는 것과 같이 그리고 사람을 등에 싣고 채찍을 맞아가며 정신 없이 달려가는 말과 같이 무조건 순종하는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 주인의 식탁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돼지나 닭과 같이 그리고 제사상 위에 오르는 각종 해산물이나 과일과 같이 아무런 불평 없이 순종을 하며 제물까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축생들이 축생의 탈을 벗기 위해서는 수많은 치욕(恥辱)을 참으면서 인내(忍耐)해야 한다. 이렇게 축생들이 짐승의 탈을 벗고 수라계로 들어가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축생들이 축생의 탈을 벗고 수라가 되려면 반드시 인욕(忍辱), 즉 모든 굴욕을 참고 견디는 인내심(忍耐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따라 수행하고 있는 축생들이 참고 인내해야 할 인욕(忍辱)은 그 무엇보다 오염된 비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불자들로부터 오는 비난(非難)과 핍박(逼迫)을 견디어 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오류(誤謬) 없는 말씀은 불교의 전통과 교리로 만들어진 비 진리와 항상 대적(對敵)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직 부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천상을 향해 달려가는 수행자들은 육신적인 고통을 참는 것보다 비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오는 각종 핍박고 유혹을 참아 내기가 더 어렵고 힘든 것이다.

이러한 인욕(忍辱)의 과정을 모두 마친 자라야 비로소 축생의 탈을 벗고 수라(修羅)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욕(忍辱)의 수행을 마친 축생들이 수라계(修羅界)로 들어가 수라가 되면 그때부터 마음을 정결케하는 선정(禪定)의 수행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지금까지 수라계(修羅界)에서 행하는 수행을 정진(精進)으로 알고 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진(精進)은 인간계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수행이며 수라들이 행하는 수행(修行)은 선정(禪定)이다. 왜냐하면 삼악도(三惡道)에서 번뇌(煩惱 )와 망상(妄想)으로 오염(汚染)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선정(禪定)이지 정진(精進)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길 : 수라계(修羅界)

인간으로 해탈하는 길 - 선정(禪定)

육바라밀(六波羅蜜) 중에 지옥(地獄), 아귀(餓鬼),축생(畜生)의 삼계(三界)를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육신과 정신세계라면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세계는 형이상학적인(形而上學的) 마음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지옥, 아귀, 축생의 존재들은 육신과 생각을 정결케 하는 세계이며 수라계(修羅界)부터는 마음을 정결케 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 수라계(修羅界)로 들어간 수행자들은 날마다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정결캐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라(修羅)라는 말은 아수라(阿修羅)라는 단어의 준말로 단어의 뜻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이라는 의미이다. 

아수라(阿修羅)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갑자기 화재나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출입구를 향해 속히 빠져나오려고 정신없이 아우성치며 서로 뒤엉켜 몸 싸움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라(修羅)의 뜻은 이러한 몸 싸움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전도(顚倒)된 몽상(夢想)과 탐, 진, 치(貪, 瞋, 癡)로 인해 일어나는 번뇌망상(煩惱忘想)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싸우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수라(修羅)들이 인간으로 해탈하기 위해 인간계를 향해 가는 수행자들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더불어 세상으로부터 오는 각종 유혹과 싸우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수행자가 이러한 싸움에서 패(敗)하게 되면 파계승(破戒僧)이 되어 속세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선정의 수행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패배(敗北)한 파계승(破戒僧)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마음을 닦는 수행자들은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과 속세의 미련을 버리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잘못된 불교의 교리(敎理)와 제도(制度)의 틀 속에서 의식화(意識化)된 고정관념(固定觀念)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더욱 힘이 드는 것이다. 즉 오온(五蘊)으로 구성(構成)된 자신의 존재를 버리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라계(修羅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깨끗이 닦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길이 바로 선정(禪定)이다. 선정(禪定)은 그동안 쌓아 놓은 고정관념(固定觀念)과 마음의 욕심을 모두 버리고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참선(參禪)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선정(禪定)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말씀을 주야(晝夜)로 묵상(默想)할 때 잘못된 고정관념(固定觀念)들이 하나하나 부서져서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북방불교(北方佛敎)에서는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화두(話頭)로 붙잡고 참선(參禪) 수행하며 남방불교(南方佛敎)에서는 몸의 움직임이나 호흡에 집중하여 고정관념(固定觀念)을 없에는 방법으로 "위빠사나"라는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된 생불(生佛)이 없는 것은 물론 인간계로 들어가서 인간이 된 인간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찰(寺刹)도 많고 스님들도 많고 법당(法堂) 안에 모셔 놓은 부처님도 많지만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신 생불(生佛)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오늘날 살아계신 생불(生佛)을 찾아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수행을 하여 인간이 되는 것은 물론 천상에 올라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행하는 참선(參禪)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도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모두 떠나가고 무아(無我)가 된다면 인간이 되어 인간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길 : 인간계(人間界)

인간계에서 천상에 오르는 길 - 정진(精進)

인간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사람사이, 사람들이 사는 곳, 중생들이 윤회(輪廻)하는 곳, 사람의 세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이란 사람을 말하며 인간계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이나 인간계는 사람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세계를 벗어나 인간으로 해탈(解脫)한 보살(普薩)들의 세계를 말한다.

역학(易學)자들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각기 자신의 띠(十二支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모두 짐승의 띠를 가지고 태어나며 사람의 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들의 외형은 모두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나 인간의 내면의 상태는 짐승들과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열두 띠 중에 상직적인 동물이 하나 바로 용(龍)이다. 용(龍)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짐승 혹은 상직적인 동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용이 바로 짐승의 탈을 벗고 천상에 올라 부처님으로 성불(成佛)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짐승들 중에서 성불(成佛)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짐승은 오직 용 뿐인데 부처님은 용의 상태에 있는 존재들을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통래서 인간(人間)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은 짐승의 탈을 벗고 중생(重生)  한 영적(靈的)인 존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계(人間界)에서 천상계(天上界)로 올라가 부처가 되려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진(精進)이라는 단어의 뜻은, "정력을 다하여 나아가는 것, 열심히 노력하는 것,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것,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 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진(精進)의 뜻은 모든 생각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주야(晝夜)로 묵상(默想)하며 달려가라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 가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병원으로 달려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은 만사를 제처 놓고 오직 살려는 일념(一念)으로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경각(頃刻)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나 약속이 있어도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계(人間界)에 있는 수행자들은 속세의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직 천상을 향해 일심전력(一心專力)으로 정진하는 자들을 말한다. 

일심전력(一心專力)이라는 말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직 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계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의 소망과 목적은 오직 천상에 올라 부처가 되는 것인데 천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둠 속을 항해하는 배가 등대의 빛이 없으면 향방을 모르듯이 무명(無明) 가운데 있는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인간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계에 머물고 있는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심전력(一心專力)을 다해 천상계를 향해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계에 있는 인간들이 천상에 올라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자리(自利)와 이타행(利他行), 즉 상구보리(上求普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행해야 한다. 상구보리(上求普提)는 자신이 성불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며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귀계(餓鬼界)와 축생계(畜生界)와 수라계(修羅界)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인간으로 해탈(解脫)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인간들이 천상(天上)에 올라가 부처가 되려면 아귀와 축생(畜生)과 수라계(修羅界)에 있는 자들을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 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도와주는 이타(利他)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천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반야(般若)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에 해탈하여 관자재보살(觀自在普薩)이 되셨기 때문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密多)라는 뜻은 부처님께서 천상(天上)에 오르기 위해 오직 반야(般若)를 의지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열심히 행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반야(般若)를 믿고 의지하며 이타(利他)를 행행할 때에 반야(般若)의 도우심으로 열반(涅槃)의 세계인 천상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들이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신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야(般若)의 전적인 도움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들은 반야의 존재를 신(神)으로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의 자비심(慈悲心)으로 날마다 이타(利他)를 행할 때 해탈이 되어 천상(天上)에 올라 부처가 되는 것이다.

여섯 째 길 : 천상계(天上界)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길 - 지혜(智慧)

천상계(天上界)란 하늘의 세계 또는 열반(涅槃)의 세계라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상계는 반야(般若)의 세계,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 부처님의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천상의 세계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통해서 해탈하여 성불하신 부처님들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들이 계신 천상의 세계는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상태와 그 차원에 따라 각기 그 위(位)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부처님이 계신 열반의 세계에 1차원에는 관자재보살(觀自在普薩) 부처님이 계시고 2차원에는 보리살타(普提薩陀) 부처님이 계시며 3차원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계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 즉 성부(聖父) 하나님, 성령(聖靈) 하나님, 성자(聖子)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용어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세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무지한 중생들이 혜안(慧眼)이 없고 영안(靈眼)이 없어 서로 자기 종교만이 진실하고 옳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들어와 관자재보살(觀自在普薩) 부처님이 된다 해도 2차원의 보리살타(普提薩陀)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智慧) 즉 반야(般若)의 지혜(생명)를 가지고 오계(五界)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성불(成佛)을 할 수 있도록 이타행(利他行)인 하와중생(下化衆生)을 끊임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계(五界)에서 생로병사의 윤회(輪廻)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성불을 시키면 보리살타(普提薩陀) 부처님으로 승화(昇化)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타를 행하여 보리살타(普提薩陀) 부처님이 된 후에도 무상정득정각(無上正等正覺)인 삼세제불(三世諸佛)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야(般若)를 의지해야 하며 반야(般若)의 지혜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타행(利他行)인 하와중생(下化衆生)을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리살타(普提薩陀) 부처님이 이타를 행치 않으면 구경열반(究景涅槃)에 이르러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해탈을 하여 부처님이 되신 후에 그의 여생(餘生)을 자신의 몸을 불태워가며 하와중생(下化衆生)을 하신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그 결과 구경열반(究景涅槃)에 들어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지혜에 이르러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해탈하여 관자재보살이 되었다 하여도 삼세제불(三世諸佛)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와중생(下化衆生)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천상의 세계는 반야(般若)의 세계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근원적 반야(般若)의 지혜를 말하는데 이 지혜를 가리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邈三普提)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반야(般若)를 가리켜 시대신주(是大神呪)요 시대명주(是大明呪)요 시무상주(是無上呪)요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라 말씀하시는 것인데, 주(呪)  라는 뜻은 진언(眞言-진리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반야(般若)는 이 우주 만물을 초월(超越)하여 계신 제일 큰 신(是大神呪)으로 한없이 밝고 깨끗하시며(是大明呪) 반야(般若) 이상의 신(神)이나 지혜는 존재하지 않으며(是無上呪) 이 말씀과 비교할 어떤 말씀도 없다(是無等等呪)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삼세제불(三世諸佛) 부처님은 중생들을 모든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건져 주시는 무한한 원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반야(般若)는 곧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반야(般若)는 진실불허(眞實不虛), 즉 반야의 본체는 진실이시며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서 그 안에는 거짓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반야(般若 )를 시대신(是大神) 곧 가장 크고 위대하신 신(神)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불교의 교리로 인한 전도몽상(顚倒夢想) 때문에 불교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신을 전적으로 부정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신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마치 생명이 없는 쭉정이와 같은 신앙인 것이다. 때문에 출가승이나 수행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마음을 닦으며 수행을 해도 해탈(解脫)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불교가 말살해 버린 반야(般若)를 다시 신(神)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자들이 반야(般若)를 신으로 다시 모시지 않으면 예불 시간이나 법회 시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경(讀經)을 하고 법문을 들어도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자들이 지금까지 반야(般若)를 모르는 것은 마치 자기 손에 보화(寶貨)를 쥐고 있으면서도 그 보화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형상(形象)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자들은 반야를 다시 신(神)으로 모시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피로 천상에 올라가 모두 부처가 될 것이다. 

이상의 말씀과 같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무명의 중생이 지옥계(地獄界)에서 나와 아귀계(餓鬼界)와 축생계(餓鬼界)와 수라계(修羅界)와 인간계(人間界)를 거쳐 천상(天上) 곧 천국(天國)에 들어가 부처가 되는 길과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지옥(地獄)에서 천국(天國)까지 가는 길과 그 과정(過程)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육바라밀(六波羅蜜)은 하나님께서 땅(지옥)의 존재를 육일 동안 말씀으로 재창조하여 하늘(천국)의 존재로 만드는 과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設)하신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베다(Veda)경 곧 모세 오경의 율법서(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육일 창조를 보시고 깨달아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다경은 당시에 창조의 신(Brahma: 브라마)을 믿고 섬기는 아리아 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경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약 천 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싯달타 태자가 출가를 하여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은 진리는 베다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곧 율법서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불경에 기록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나 성경에 기록된 육일 창조(六日 創造)는 모두 지옥계(땅)의 존재가 천상(천국)으로 올라가 부처(하나님의 아들)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계속=  

원문 출처 (베레쉬트 서원)  글 : 道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