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 야 말씀 해설

이 사 야 63장 해설

제라늄A 2024. 7. 5. 15:53

이사야 63:1~6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해설: 에돔은 에서를 뜻하며 에서는 초림 주와 그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초림 주를 보내주시고 그 백성을 생산토록 하신 분이므로 그가 곧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초림 주)의 의복이 붉으며 그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그 얼굴빛이 붉다고도 했던 자입니다. 얼굴빛이 붉고 의복이 붉어서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이 된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본문에서 알려주듯이 붉다는 것은 하나님의 노함을 입고 더럽혀짐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가 서에는 일광에 쬐어 내 얼굴이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라고도 했는데(아가1:6) 이는 초림 주는 구원주가 아니고,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안겨주러 오신 창조미완의 율법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림 주(에돔)는 율법백성의 머리이시므로, 하나님의 노하심을 입고 포도주 틀을 밟듯이 밟힘을 받고 그의 옷이 붉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행차는 화려하고 구원하기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율법구원은 한 쌍으로 존재합니다. 율법을 통해 먼저 인간의 죄를 드러내신 후에 구원을 베푸시는 창조순서를 따라, 온 세상에 율법백성을 먼저 지으신 후에 이제 구원을 베풀 차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에 자기 백성을 바라보니 아무도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하나님은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과 구원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 쌍으로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만이 그 율법의 죄를 해결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 주로 나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율법을 범한 율법백성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율법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그 일은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됩니다. 그리고 재림 주가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낱낱이 풀어낸 진리의 말씀으로 백성들의 죄를 도말한다는 뜻이 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백성들의 죄가 도말되면 예전의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폐해지는 것입니다. 즉 율법완성이 곧 율법의 폐함이 되는 동시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신 것은 재림 주를 통해 율법이 폐한 바(완성) 되므로 말미암아 율법백성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림 주(에돔)의 복음백성은 율법백성이요, 율법백성은 오늘날 재림 주 때에 반드시 멸망을 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존재입니다. 
이사야 63:7~13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해설: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하나님은 이성과 논리의 근본이요, 높으신 형이상학이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마땅히 이성적 논리적 형이상학적으로 머리로 명백히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가 아직 어려서 글도 잘 읽을 줄 모르는 저 이천 년 전 문맹시대에는 인간의 눈높이를 따라 초림 주를 통해 복음백성들에게 이적, 기사, 표적 등의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기복신앙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복음백성들은 그 유치부 수준 그대로 행했으므로 그 때는 거짓을 행치 하니 하는 자녀라고 하셨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안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젖먹이 어린아이 신앙이지만, 그 당시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인지가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이 반역했으므로 하나님이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어떤 의미에서 반역의 죄를 범 했는가이다 입니다.  
에덴동산의 기록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시험을 받았으나 그 시험은 우리들의 벗은 몸(죄)을 드러내기 위한 시험이므로 반드시 넘어지도록 설정된 예정된 코스의 반역죄를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심문을 받게 된 때는 날이 서늘한 때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창3:8) 날이 서늘한 때는 저녁때다. 저녁때는 복음시대의 날이 저문 때를 뜻하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고 난 후가 된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오늘날은 문맹의 때가 전혀 아닙니다. 
인류는 수렵시대에서 출발하여 농경 사회로 와 산업사회를 거쳐 오늘날은 정보의 열풍이 동서사방에 불어 닥치는 지식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지식. 정보화시대에 현대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은 성경을 샅샅이 상고할 의무가 주어지고, 진리의 말씀을 명백히 논리적으로 깨달아야만 하는 높은 지성과 깨끗한 인간양심의 인성이 요구됩니다. 성경은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의 비유로 기록된 비밀문서인데 비유 속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문자 그대로 믿던 과거의 기복신앙에 고착해 있다면, 오늘날은 그것이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을 받게 된 때는 서늘한 때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늘한 때, 즉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고 난 후인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도 깨닫는 자가 없이 과거의 유치부신앙 그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죄악 중에 빠져 있는 앉은뱅이요 소경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습니다. 치신다는 것은 그 죄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던지 그 죄악을 해결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날이 서늘한 때의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은 의로운 분노와 심판이며 참으로 감사해야 할 사랑의 매요 구원으로 통하는 자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하심과 심판을 받는 이때에 사람들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시대의 그림자입니다. 출애굽이 막 이루어지던 모세 때는 초림 주를 통한 복음을 막 받기 시작하던 기복신앙 때를 비쳐주는 동일한 사건인데, 옛날을 그립게 추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지성인답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수준을 높여야 하는데 그것은 싫고, 오직 저 유치한 과거의 나무우상 신앙이 마냥 그립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요즘 우리 주변에서 열정적인 사람들일수록 과거 원시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 초와 시대 말 오늘의 인간 지식수준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모르며, 하나님은 그렇게 다른 상황에서 오늘날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 수준이 아주 높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딱한 노릇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은 젖을 먹지만 장성해서는 딱딱한 것을 먹어야 함에도 계속 젖만 찾고 있으면서 그 때 그 시절의 감성적인 하나님만 그리워합니다. 
이사야 63:14~19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히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 하사 돌아오시옵소서,  
해설: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세를 영도자로 한 출애굽 때와 초림 주의 복음초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높이를 맞추시느라, 전적으로 자기 백성을 젖먹이 어린아이들처럼 다칠세라 보듬어 안아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마치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온 세계에 대내외적으로 영화롭게도 하셨다고 추억하면서, 이제 주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어디 있는 가고 눈물짓고 있습니다. 주가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히 이제는 그쳤다고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야곱)이 오늘의 우리를 인정치 아니한다 할지라도 주는 상고부터 우리 아버지였고 구속자였고 인도자임이 확실한데 어찌하여 지금은 떠나 계시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의 백성들은 지금 옛 시절을 추억하며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굽어 살펴주실 것을 계속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앙 수준을 한 단계 확실하게 높여서 크신 이름의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과거의 낮은 신앙에 주저앉아 있는 자기들에게 하나님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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