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상기의 말씀은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 부요함으로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었고,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때문에 누워 있는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얼마나 호화로웠으며 거지는 얼마나 비참했던가? 그러면 천국비유에서 우선 부자는 누구이며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성경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비유비사로 기록한 말씀이며 따라서 그 비유는 실존예수님의 의해서만 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기의 본문의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풀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2.000년 전의 예수님도 성경 한 줄 풀어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나 전혀 성경의 참 뜻을 알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서신 서를 집필한 사도들과 오늘날 모든 기독계열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성경의 참 뜻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사자후를 토하는 성경풀이를 함으로써 불세출의 영적 부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기독인들은 터무니없이 성경을 왜곡한 비 진리로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며 배불러 연회를 즐기고 있는 교만한 영적인 부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영적으로 교만한 자를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5:2~5 부 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비 진리)은 썩었고 너희 옷(말씀)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믿음)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성경은 저 육천 년 전부터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감추신 비유였으며 예수님조차도 성경 한 줄 풀어주신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유가 아니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아니하신다고 했기 때문에 성경 신, 구약이 모두 꼭꼭 깊이 감추어진 비유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기독교에서 “출애굽”(탈출)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은 성경의 참 뜻을 알기 위해 이교회 저 교회 문전걸식하며 부자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 지로 배를 채우는 영적 거지 행각을 벌이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찾고자 하나, 성경이 감추어진 비유이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에 잠 못 이루고 탈진하고 피골이 상접된 고난의 길을 가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곧 거지 나사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정직하게 올바로 찾고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거지 나사로인 반면, 하나님을 부정직하게 비유 그대로 평안하게 믿어버리는 교만한 자가 부자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자와 부정직한 자에 대한 천국비유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가 정직하게 힘들게 하나님을 찾았는가? 반면, 누가 부정직하게 아무렇게나 편한 대로 탐욕으로 구원받고자 하나님을 찾았는가? 다시 말해 진실에 기반 한 구원을 바라는 거지, 나사로와 탐욕에 기반 한 구원을 추구했던 부자, 이제 극명하게 차이 난 이러한 두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역전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2~26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상기의 말씀은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고, 부자는 죽어서 음부의 고통 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현생에서 저 생으로의 생물학적 육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영적 죽음을 뜻합니다. 동시에 영적 죽음이란 곧 반드시 영적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영적 부활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인간은 살았다고 하나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어 있는 몸입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는 이런 사람을 죽은 자라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육체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의 영의 생명이 없는 혼의 생명의 존재를 모두 죽은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21-22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들 안에 혼의 생명은 존재하나 하나님의 생명인 영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은 부친을 장사 지내게 하고 산 자인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하나님의 영의 생명이 없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혼의 생명의 존재들을 모두 죽은 자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의 부활도 죽은 송장이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의 영의 생명이 없는 혼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영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죽은 자가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살아있는 기독교인들이 곧 무덤입니다. 이렇게 죽어있는 무덤에서 우리가 부활하게 되는데 그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렇게 현재 살아있는 기독교인들이 곧 무덤인데, 그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망에 처해 있는 인간이 오늘날 실존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새 말씀(그의 음성)을 듣게 되어 부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지나사로는 정직한 자이므로 생명의 부활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표 했던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한 것입니다. 반면, 부자는 부정직한 자이므로 심판의 부활로 나왔다는 뜻에서 음부의 고통 중에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직하게 하나님을 찾고 찾았던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의 음성을 듣고, 즉 진리의 새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지켜 행함으로써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직했던 부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배가 불러 있는 부자이므로 진리의 새 말씀을 받아들일 틈이 없어서 외면하였기 때문에 영생의 기회를 놓쳤다는 뜻에서 음부의 고통 중에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원문출처: 새사람 블로그)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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