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간음”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 7계명을 통해서 “간음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며 율법에 “간음”을 행한 자는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고 “간음”을 엄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을 행하다가 현장에서 잡아온 여인을 아무런 정죄도 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게 하고 더 온전케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범하고 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면서 그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계명을 범한 일은 “간음”에 대한 일뿐만 아니라 “안식일”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정죄를 받은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시는 “간음과 안식일”의 뜻을 예수님은 올바로 알고 있지만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알고 지키는 율법과 예수님이 알고 지키는 율법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간음과 안식일”을 모두 영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두 “육”으로 알고 육신적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2~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니라,
상기 서기관들의 말과 같이 “간음”을 행한 여인은 율법에 분명히 돌로 치라고 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아무런 정죄도 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랑과 긍휼히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간음”을 한 자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거나 오히려 범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이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공의까지 무너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폐하거나 범할 수가 없고 범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간음”과 유대교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알고 지키고 있는 “간음”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간음”을 “영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육적”인 “간음”으로 알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영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데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육적”으로 보고 각종교리를 만들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교회의 법이나 교리로 만들어 지키는 행위를 “간음”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자들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십계명을 가지고 교회의 법이나 교리로 만들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신랑(참목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신랑(삯꾼목자) 찾아가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삯꾼목자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간음한 음녀”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간음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소돔과 고모라성도 “간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고 있는 “영적인 간음”은 죄가 중한 것입니다. 때문에 육신적인 “간음”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영적인 간음”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간음”의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육적으로 알고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께서 아무 정죄도 하지 않고 보내주신 것은 이 여인은 “영적인 간음”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둘러 서있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은 허리를 두 번이나 숙여 땅에 쓰신 글은 과연 무슨 내용일까?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땅에 기록하신 글은 영안이 열린 자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시고 난 후 무리들에게 이 글을 보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는데, 무리들은 그 글을 보고 모두 양심에 가책을 느껴 돌을 내려놓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글을 기록해서 무리들이 말없이 돌아간 것일까? 예수님께서 땅에 처음에 기록한 글은 새 계명의 “첫 계명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라는 것과 두 번째 기록한 글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는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구원하고 살려서 하나님이 아들로 만들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계명을 기록하시고 무리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계명을 모두 이룬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이 두 계명을 모두 지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가 없기 때문에 모두 양심이 찔려 돌을 내려놓고 돌아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무리들이 육적인 “간음”은 하지 않았지만 영적인 “간음”은 이미 행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신 “실존예수”를 믿고 영접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는 유대교 제사장들이나 오늘날 거짓목자를 믿고 따르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사도들까지 배척하고 핍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참 목자를 떠나 거짓목자를 따라가는 자들을 “간음”하고 있는 자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기록된 말씀을 오늘날기독교인들은 “육”의 몸이기 때문에 “육”의 기준으로 알고 지키는데 하나님의 영적인 뜻을 올바로 알고 지켜야 합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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