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삶은 과연?

※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라 ※

제라늄A 2020. 2. 22. 02:33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라    

이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이 세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지금은 어떤 때인가? 

전도서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그렇다. 참으로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이 반드시 장수하지 않으며, 악인이라고 꼭 단명하지도 않습니다. 의인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으며, 죄인이 반드시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자가 높은 자라에 앉아서 호령하는가 하면 청렴한 사람이 초야에 묻혀 삽니다. 이 세상은 선악과 청탁과 상하가 뒤바뀐 세상입니다. 헤롯이 왕위에 앉았을 때, 그리스도가 말구유에서 나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흔히 세상 사람들이 두고 쓰는 문자가 있습니다.

 

 “썩을 놈의 세상,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살았을 때에 실컷 마시고 즐기자!”고, 참으로 그렇게 체념해야 하는가? 선을 행하는 결과는 악을 행하는 결과와 같은 것인가?  체념이란 지혜 있는 사람의 최후의 깨달음이란 말인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이 의문을 푸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말로서 이 세상의 이때가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3) 곧 지금은 예수의 적이 제멋대로 그 세력을 휘두르며 하나님과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을 거역하고, 이를 섬기는 자들을 괴롭힐 수 있는 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요2:4)라고 그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승천 후 2000년 후인 오늘날도 예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 그의 제자 된 자는 지금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가운데 머물러 그의 적의 곁에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낙원은 아닙니다. 악마가 횡행하는 시험의 광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예수가 시험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광야에 간 것처럼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막1:12-13)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고 짐승과 함께 계셨던 것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숫자 '4'는 고난의 수로서 춘하추동 사계절의 모든 과정과 같이 모든 시험 환난을 잘 통과해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 애급을 해서 광야에 나와 40년 동안 모든 고난과 환난을 겪은 것은 이 시험을 통과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이 상징적인 40년(일생)동안 이 세상에 있으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면서 짐승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있어, 그가 메시아 될 자격을 완성하기 위해 광야의 시험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또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시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잠시 악마의 손에 넘기신 것입니다. 그가 그의 종 욥을 시험(완성)하기 위해서 사탄에게,“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욥1:12)고 욥의 소유물과 그 몸을 사탄에게 내 주신 것처럼 그는 지금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소유물과 우리 몸을 사탄의 손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이제 마음껏 우리를 괴롭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불의는 멋대로 우리 위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맞도록 애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먼지나 티끌처럼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이익은 조금도 우리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증거는, 우리의 생애를 통해 그 사실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심하랴?  시험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신다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만일 보이는 것을 따라 걸어간다면, 우리는 무신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지니라(롬8:24-25)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잡히든지 안 잡히든지 오로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여자(거짓 교회)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결한 처녀로 약속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계14:4)

 

그렇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신앙에 의해서 걸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시험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싸움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참 신앙인은 누구나 욥과 같은 시험이 기다립니다. 그의 생애는 욥의 그것입니다. 그렇다. 이상입니다. 욥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고난이 그를 떠나고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지만,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인의 전 생애는 인내와 대망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에게는 그의 놓임은 죽음과 부활이다. 이 해방이 오기까지 그의 복역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전 생애가 시험이다. 이 세상에서 원만한 행복은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일생을 통해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 경계입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재난은 그에게도 임합니다. 그리하여 불신자에게 임하지 않는 많은 곤란이 특히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까닭으로 인해서 도난, 천재, 질병 등 이세상의 일반적인 재난에서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밖에 참 진리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또 그 독특한 고뇌가 옵니다.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병 없이 잘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사도 야고보는,“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그의 신앙의 보상으로서 많은 행복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과 환난, 이것에 대한 경계로,“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 하라(고전16:1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 지어다(벧전1:13)라고 말하였으며, 또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고 경계에 또 경계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여 무엇 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고 무슨 유익이 있는가?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3:2)입니다.

 

만일 인생의 의문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인생의 가치도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아들로 삼고 계신 것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혹독한 시험을 통과하고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시험을 통과한 후에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귀한 것은 그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그 싸워 이겨서 얻은 품성이다. 육체는 태어나나, 영혼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은 신앙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을 확인하는(히11:1)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시험하기 위한 이 세상과 이때가 없었다면, 사람에게 신앙이 생길 경우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이 없으면 영혼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감에 의하지 않고, 영의 의식에 의해 하나님을 알아야만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있고, 또 자기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든가 유혹이라고 하면 굉장히 괴로운 것 같지만, 이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신앙도 자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고 말한 것이다. 금이 불로 연단되는 것처럼, 신앙은 혹독한 시험에 의해 견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높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을 이 괴로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라 환난이여, 오라 시험이여”이다. 우리는 몸이 불탈 것 같은 고난이 닥쳐와도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13:15)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인생의 황야에서 악마는 항상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악마의 계교를 간파하여 잘못이 없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의 참됨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세상을 이기는 입니다. 악마의 계교를 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확인하고, 견고한 의식의 바탕 위에 우리들의 신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