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삶은 과연?

내가 반드시 가야 하는 인생의 두 갈래 길

제라늄A 2022. 2. 26. 20:25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을 향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는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기에 내가 선택한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시작과 끝이 어딘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 떠나는 “길”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누구나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인생인 것이기에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한다 해도 반드시 다가올 인간의 죽음이라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즉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아무도 이해 할 수 없는 “길”은 사망의 그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좁고 협착한 찾는 이가 없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며 그 “길”은 “혼적”인 삶을 떠나 “영적”인 삶을 찾아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죽음 없이 갈 수 없는 아주 가깝고도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내 일생에 진정 불쌍하고 아주 가련한 자 일 것입니다. “길”이란 출발 지점이 있고 목적지에 도착을 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시작이 되어야 도착을 할 수가 있으며 시작도 하지 않고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면 그 “길”은 영원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미 정해져 있고 모두가 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길”은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하는 것이며 “세상 욕심”을 향해 가는 “길”이든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이든 내가 선택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나의 “인생 길”을 살면서 매우 중요한 시점에 도달을 했고 선택할 여지가 없이 나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한 “길”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왔다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데 상상할 수도 없는 내 안에서 두 갈래 “길”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욕심을 향해 달려가는 “길”과 또 하나는 자신을 부인하고 욕심을 버리고 가는 “길”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조건 가던 “길”을 멈추거나 돌아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겠지만 아무도 가기 싫은 “길”을 가겠다고 정하고도 서성거리는 자신을 보고 현재 나타난 “길”은 거부할 수도 없고 그 “길”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되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육체와 “혼”의 거짓됨과 욕심을 벗고 진실한 마음으로 바꾸는 눈물 없이 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아주 멀고도 험하고 좁고 협착한 찾는 이가 없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아주 외롭고 고달픈 “길” 자신을 부인하는 “길” 과연 자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머나먼 “길”인 것입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선택함으로 나는 외롭고 고달프지만 원망하며 돌아설 수도 없는 죽음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바라보다 하늘과 내가 하나 되어 하늘 안에 항상 머물러 있고 싶어 나는 죽기를 바라며 참고 견디면서 오늘도 죽어가고 내일도 죽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인가 봅니다. 오늘 사는 인생이 내일 온다 해도 오늘은 어제와 같이 죽어 가고 내일을 향해 또 다시 죽기 위해 오늘도 다시 죽어 가야만 하는 내일의 내가 살아나기 위해 오늘도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처럼 살지 않고 새롭게 태어날 나이었기에 어제와 오늘의 나를 잊어야 하고 내일의 나를 바라봅니다. “홍해 바다”에서 죽고 “요단강”에서 죽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으면 “부활”(거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시고 죽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현제의 고난은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날마다 죽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죽음이 곧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일 죽지 않으면 매일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살아 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고 계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길”을 떠난 나의 삶이 죽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 새롭게 살 수 있는 진실한 “길”을 찾지 못하고 죽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죽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내가 싫어 “길”을 떠난 것이고 그 “길”은 결국 언젠가는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고향을 찾는 “길”이었습니다. “길” 떠난 실체는 허상이라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상을 실상으로 잡고 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란 짐승의 탈을 벗지 못한 거짓의 실체와 같은 존재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돌이켜 돌아온 고향집은 아주 초라하고 소박한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초라하고 보잘것 없던 집이 이제는 아주 조용하고 편안한 나의 본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초라한 나의 본향은 영원히 “안식”할 처소로서 얼마나 고마운 고향집이었던가 나의 집을 지키고 있던 그대는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안겨줄 고향 집을 잘 돌보며 지켜온 그대는 얼마나 고마운 나의 고향집이란 말인가?  나의 고향은 나의 꿈을 이루어낸 영원한 안식의 땅이기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나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으니 나의 고향은 나를 지켜줄 평안한 “안식”의 땅이었습니다.

고향을 멀리 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 삶의 보상이 진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아는 것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늦었다 하지 않고 이제라도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며 옥토 밭에 좋은 씨 뿌려 잘 가꾸듯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으로 이루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살아가는 것이 죽기 위해 달려온 순례자의 “길”이었으며  결국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날 영원한 삶을 찾아 나선 “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였기에 시작도 내 안에서 끝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길”은 보물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 와 같이 자신 안에서 출발해야 하고 모든 보화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보화가 있음을 발견하고 나그네가 집을 찾아 돌아오는 것과 같이 가던 “길” 멈추고 돌이키는 것이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안식” 하나님의 나라 “천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찾아야 할 “길”이었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영(靈)과 혼(魂)의 실체는 무엇인가?

영(靈)과 혼(魂)은 무엇을 말하며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영과 혼”은 사람의 생명을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영과 혼”을 “영혼”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육”은 “혼”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 합니다. 때문에 사람의 실체는 몸이 아니라 “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코에 불어넣은 생기는 “영”(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분명히 “혼”(사람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나타난 “생영”은 히브리어 원문에 “영”(르아흐)이 아니라 “혼”(네페쉬)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영이 된지라, 이 말씀은 기록자들이 “혼”을 “영”으로 잘못 기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불어 넣은 것은 “영”이 아니라 “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르아흐”는 하나님의 “영의생명”을 말하고 “네페쉬”는 사람의 “혼의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에 속한 인간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 곧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은 “영”이 아니라 “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은 “영”이며 사람의 생명은 “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생명이 “혼”인지 “영”인지도 분별을 못하고 막연히 “영혼”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명인 “혼”은 신약성경 헬라어원문에도 “프쉬케”로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인 “영”은 “프뉴마”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몸속에는 “혼”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야고보서를 통하여 아직 하나님 “영”이 없는 “혼”의 존재들은 모두 죽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 2:28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에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은 “영혼”이 없는 자가 죽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몸이 죽은 자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안에 사람의 생명인 “혼”은 있어도 “영”이 없으면 죽은 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죽은 자를 육신의 몸으로 기준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몸은 살아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없으면 죽은 자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죽은 자”가 어떤 자를 말씀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 8:21-22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지금 육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들 안에 “사람의 생명”은 존재하나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혼”은 가지고 있으나 “영”이 없으면 모두 “죽은 자”라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육신의 몸이 죽었을 때 “죽은 자”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기독교인들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알고 “사도신경”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죽은 사람의 “혼의 생명”이 하나님 “영의 생명”으로 거듭(부활)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학”은 성경을 왜곡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의 몸 안에는 “혼의 생명”뿐 하나님의 “영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생영”이 아니라 “생혼”입니다.

때문에 “혼의 생명”에 속한 첫 아담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6일 천지창조”즉 “6번”을 거듭나야 하나님의 “영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곧 “혼”에 속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땅에 속한 육신의 “혼의 존재”들을 구원해서 하늘에 “영의 존재”곧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땅에 속한 그의 제자들을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먹이고 입혀서 하늘에 속한 하늘의 “영적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생명은 “혼”이며 “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과 혼”이 결합이 되어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혼”이 “육”의 몸에서 분리되면 곧 죽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목사들도 자신의 존재가 “혼”인지 “영”인지 그리고 자신은 죽어서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존재들은 “천국이나 지옥”을 가본적도 없지만 눈으로 본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천국이나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영”의 존재인 “실존예수님” 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말하며 짐승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나 짐승이 모두 동일한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19~20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음으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하나님은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인생에게 임하는 일과 짐승에게 임하는 일이 모두 동일하여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다는 것과 짐승이 죽는 것과 같이 사람도 동일하게 죽는 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흙에서 왔기 때문에 다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영”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지옥)으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기록된 “혼”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혼”(네페쉬)이 아니라 분명히 “영”(르아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번역자들이 잘못 오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인 “영”만 올라가는 곳이며 더러운 “혼”은 절대로 올라갈 수가 없고 모두 지옥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혼”의 존재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루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를 받아 “혼적존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영적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