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삶은 “고통과 시련”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울면서 태어나 온갖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고통”은 어제 오늘만 있는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영원토록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행복하게 살다 떠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다가 웃으면서 따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동일한데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고통”속에서 살다가 떠나가며 또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즐겁게 살다가 떠나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생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는 사람과 인생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자신이 받은 “고통”의 진정한 뜻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즐겁고 받는 “고통”도 즐겁지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모르고 또한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며 “고통”이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의 본질은 욕심입니다. 즉 “고통”의 근원은 욕심이며 죄의 근원도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욕심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죽는 것도 욕심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모두 욕심 때문이며 죽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도 욕심으로 인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욕심의 실체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욕심은 자신 안에서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아”(自我)가 없다면 욕심이 발생될 수 없고 또한 “고통” 받을 존재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아”(自我)를 버리면 욕심은 발생할 수가 없고 따라서 “고통”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는 곧 자신의 존재이기 때문에 설령 세상 재물이나 돈은 버릴 수 있다 해도 자신은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피조물이며 안개와 같이 잠깐 보이다 사라져 버리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았다면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거나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욕심”을 내는 것은 “무지”(無知)때문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지”(無知)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알면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고 따라서 죄도 짓지 않고 지옥도 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보기는 보아도 그 깊은 뜻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안팎”(계5:1)으로 기록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오늘날 “실존 예수”들을 믿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구원자 “실존 예수님”을 오늘도 계속해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실존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독교 “신학”과 전혀 다르다는 이유로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단자로 배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 “신학”에 의식화되어 하늘의 영적인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리”를 알려면 먼저 네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마9:17) “헌 부대”에 담으면 둘 다 다 터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알려면 먼저 지금까지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듣고 보면서 쌓아놓은 “신학 교리”의 고정관념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모든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지, 정, 의”를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또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내생”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근본 문제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 욕심에 따라 행복하게 잘 살려고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통”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의미나 신앙의 진정한 뜻도 모르고 살다가 허무하게 죽기 때문에 인생은 무상하다 혹은 일장춘몽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자기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은 이 세상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의 존재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아들 예수”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 속한 육신의 존재들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예수로 창조되려면 “애급”(세상)신앙에서 벗어나 “출애굽”(탈출)해서 “광야”로 나와 “불기둥과 구름기둥”속에서 “시험과 연단”을 받아야 하며 “광야”의 과정을 모두 마치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오늘날 “실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급”(세상) 신앙에서 벗어나 “광야”를 거처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길을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이라 말하며 이렇게 “애급”이라는 기독교 세상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즉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넓고 평탄한 멸망의 길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려면 하루속히 세상이라는 “애급”이라는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애급”신앙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불모지 “광야”로 들어가 “불기둥과 구름기둥” 아래서 힘들고 어려운 시험과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 도가니 속과 같은 “광야”에 들어가지 않으면 “애급”의 육신적인 존재가 죽어 없어지지 않고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육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왔지만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은 “광야”의 시험과 연단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연단 즉 “광야”의 힘든 고통 뒤에 나타날 “가나안”의 영광을 알고 “광야”의 고통을 즐겁게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직 세상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려면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속에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흙으로 빗어 만든 질그릇이 불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잘 구어 지지 않으면 온전한 그릇이 될 수 없듯이 육신(흙)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려면 반드시 불 도가니 속과 같은 “광야”의 징계와 연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땅(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의 불시험이 두렵다고 들어가지 않거나 회피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거나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라고 주시는 “고통”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가 받는 “고통”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받기 위해서 받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의 과정을 모르는 기독교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 즉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채우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죽어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장차 “지옥문 앞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려면 하루속히 기독교 기복신앙과 멸망의 넓은 길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사도들이 걸어가신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핍박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동일하게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는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상기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은 넓고 평탄한 멸망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욕을 먹고 온갖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렇게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말로 너희를 대적하며 악한 말을 할 때 너희에게 “하늘에 상”이 크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과 같이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고통”이나 신앙생활을 통해서 받는 “고통”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은 모두 기쁘고 즐겁게 받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고통”의 의미를 올바로 알게 되었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고통”이나 신앙의 “고통”을 모두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알고 인내하며 즐겁게 받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