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의 욕심으로 인해 왜곡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목회자의 말이 강단을 대신하고, 목회자들은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사람의 말로 개정되었으니 교단마다 새로 개정된 성경책 구입을 강요하고, 심지어 교단과 총회는 앞 다투어 공문으로 하달하고, 성경 책 판매 수익으로 목회자들의 배를 채워가는 말세의 길을 걷는 종교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뿐인가 찬송가도 개종을 시켜 찬송가 구절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게 혼잡스럽게 만들어 수입을 올려 부에 취해 종교의 본질인 말씀을 왜곡해 부패하고 타락한 이 시대를 자초한 종교지도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 기록자인 선지자나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여졌으며, 아무런 오류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에, 또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지사도들의 피 흘림의 결과로 성령의 감동으로 한국의 복음 전파를 위해 가장 바른 사본을 번역해 펴낸 역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음성과 경륜을 감히 경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무지막지한 이 시대 기독교 신학자들로 인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자들의 의해 변형 화 되어 초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神)의 말씀입니다. 신이 주신 글을 신이 아닌 사람이 어찌 알기 쉽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은 신(神)의 권위를 능멸하는 처사가 아닌가,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위가 무슨 짓인지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오늘날 기독교현실을 한탄하고 절규하고 호소하는 목자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옛날 성경은 “성령과 성신”이 구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오늘날 성경에는 신학자들이 “성령과 성신”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 “성령”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신”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약간의 혼동이 올 수 있으나 그 사역도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령과 성신”을 다 같이 하나로 보고 모든 것을 “성령”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자는 이런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요 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께서는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과 똑같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의 인도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야만 “예수”의 신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바뀌는 “성신”이 임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므로 구원의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 “성신”이 비둘기 같이 임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을 때 구원의 사역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나 “침례”의식은 똑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요1:14)을 입고 오셔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해진 성경은 도대체 오늘날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이 있음(요일5:13)을 알리는 신(神)의 글입니다. 요일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백성과의 약속입니다. 가감해선 절대로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목적은 분명 영생이고,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생” 하나만 말씀하시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생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영생은 “마지막 날”이라는 한 때를 기약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이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영접한 말씀으로 육신의 혼적인 생명이 죽고 영적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활할 때를 “마지막 날”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개정되고 변질되어선 절대로 안 되는 이유이며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안팎”(계5:1)으로 기록된 말씀을 성경을 문자대로 이해하고 판단해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고 끝난 것인 양 과거형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란 구 약속과 신 약속이란 의미며, “약속”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 남아있음이 전제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3)라고 하셨습니다. 땅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6일 천지창조 즉 “6번”거듭나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어 하나님께서 성전된 자 안에서 안식하시면 모든 것이 다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내게 직접 말씀하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만약 현재와 현실성이 없다면 성경은 그저 지나간 옛날 얘기일 뿐입니다. 신(神)과의 약속을 이처럼 거짓으로 바꿔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그들은 진정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형의 말씀이 아닌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은 나와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약속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고, 그 약속을 믿기에 신앙을 한다. 라고 하며 소망을 가진 자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짐을 믿을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사14:24)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제 성경이 약속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셨는가, 그것은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의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루어졌고, 아브람과의 약속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졌고. 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성경은 정확히 증명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과 성취는 예언하신 하나님이 한 예수를 통해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하나님이 때가 되어 예수를 들어 이루심을 깨닫게 합니다. 이제 정작 중요한 것은 신약이며 이 신약 또한 이루어짐을 믿을 수 있으니, 우리에겐 신약의 약속을 지킬 일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4 복음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은 구약을 이루신 일을 포함한 당시의 사건과 장래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또한 사도요한을 통해 장래 있어질 사건을 말씀하신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즉 신약이라 면 4 복음서의 장래사를 포함해 종합 정리된 요한계시록을 일컫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지켜야 할 예언서임을 증명하는 것은 “속히 될 일”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와 이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면…’ 등이 그 증거입니다.
구약에서 영생이 있는 줄 알고 구약성경을 상고하던 유대인들이 성경에 무지해 멸망받은 성경의 역사는 신약시대 약속 관계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겐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즉 신약인 요한계시록을 깨달아 지키는 자와 깨닫지 못해 지키지 못하는 자로 갈라지니,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생과 영벌의 약속 또한 틀림없이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덧붙일 것은 계시록은 어떻게 열리는지를 성경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안팎”(계5:1)으로 기록된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므로 사도 요한은 이 책을 열어 볼 자가 없어서 크게 울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예수님 이외에는 오늘날까지 잠을 쇠로 채워놓은 성경을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기득권을 앞세워 성경을 마음대로 열어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특히 “도마복음”은 완벽하게 “비유”로 기록된 말씀이라 인간의 상식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 성경에서 역학자들의 의해서 이미 제외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경에는 없는 복음서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